포맷전쟁과 애플

(맥마당 11월호에 실은 컬럼입니다.)

아직도 기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어린 시절 추억 중 하나는 집에 ‘컬러 TV’가 들어오던 날이었다. 당시, 여느 집과 다름 없이 우리 집에도 가느다란 네 다리로 지탱하고 서 있는 흑백 TV가 있었다. 합판인지 플라스틱인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려한 나무 무늬로 장식돼 있던 그 시절의 TV는 좌우로 열리는 미닫이 문이 브라운관을 감싸고 있었다. 간혹 전파 수신 불량으로 TV 화면이 불량해질 때에는 – 날씨가 나쁜 날도 그랬다 – TV 뒤편에 브이(V)자를 그리고 있는 안테나를 움직여 주던가, 심한 경우 옥상이나 지붕에 올라가서 안테나를 좌우로 돌려보곤 했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을 때는 TV를 몇 차례 두드려 준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이렇게 몇 차례 얻어맞고 나면 TV는 제대로 된 화면을 보여주곤 했다. 비록, 지금 생각하면 아주 형편없는 화질이었지만, 이 흑백 TV는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우주과학자의 꿈을 꾸게 해 준 <우주소년 아톰>도 바로 이 TV를 통해서 볼 수 있었고, 당시 함께 살긴 했지만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던 삼촌들도 <원더우먼>이 나오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TV 앞으로 모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드디어 컬러 TV가 생겼는데, 흑백 모노톤으로만 바라보던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총천연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비밀을 깨닫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원더우먼이 입고 있던 짧은 팬츠와 상의가 촌스런 파란색과 붉은색이라는 걸 흑백TV를 볼 때는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 선명한 영상을 만들려는 업계의 노력은 그 이후로 계속되었다. 브라운관 품질도 월등히 개선되어서 색감도 보다 사실과 가까워졌다. 한때 큰 인기를 차지했던 ‘소니 트리니트론’ TV를 보면서, 영상매체의 발전은 더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고해상도 TV의 시제품을 보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HDTV 규격은 정해져 있지 않을 때였고 대중들도 HDTV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을 때였는데, 데모 화면 속에 여자모델의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선명하게 TV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고 큰 감흥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고, 이제는 고해상도 TV가 일반인들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대로 내려가면서, 많은 가정에 HD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처음 HDTV를 샀을 당시엔 미국에서는 한국에서처럼 HD로 방영을 해주는 TV 프로그램이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일부 스포츠 프로그램, 특히 미식축구나 야구 등이 HD로 방영을 하곤 했었는데,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흘리는 땀을 마루에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마치 그동안 엽서에 인쇄된 모나리자의 그림만 보다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품을 볼 때와 같은 감동이 느껴졌다.

Farmat War

포맷전쟁

인간의 감각기관은 정말 간사하다. 이렇게 새로운 고해상도 영상에 길드니 과거의 저해상도 영상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VHS 포맷의 비디오만 보다가 DVD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뛰어난 화질에 열광했었던 기억은 이미 저편으로 사라지고 HDTV에서 보여주는 DVD 영상의 형편없는 화질에 자꾸 불만이 생긴다. 좋아하는 영화는 DVD를 사서 수집을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DVD를 구입하는 것도 자제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HD급의 영상물시장이 열리게 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관련 업계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 기대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지난 몇 년간, HD 영상물 시장을 놓고 소니를 주축으로 하는 Blu-ray 진영과 도시바를 주축으로 하는 HD DVD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기만 할 뿐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동안 PlayStation 3 출시 덕택에 Blu-ray 미디어의 판매 숫자가 HD DVD를 훨씬 앞섰다는 보도가 있어서 곧 Blu-ray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가 싶더니 몇몇 메이저 영화사들이 HD DVD만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두 포맷 간의 기술적인 차이는 미미한 편이다. 저장 용량, 동영상이나 음성의 압축 코덱 등의 미미한 차이들이 양측 지지자의 비교와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소비자가 구분할 수 있는 차이점이 아니다.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컨텐츠와 가격이다. 필자의 경우 Blu-ray에 좀 더 관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기술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디즈니가 Blu-ray만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린 아이가 있는 집은 별다른 고민 없이 Blu-ray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두 진영의 포맷전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맷전쟁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컨텐츠 전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변화하는 소비패턴

그런데, 이 포맷전쟁에서는 간과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유통 문제이다. 영상기술의 발달에도 두 진영이 취하고 있는 유통 방식은 사실 옛날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막상 눈을 우리 주위로 돌려 보면, 소비자들이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은 무척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보고 싶은 영화를 구하고자 비디오 대여점을 찾기보다는 (비록 그것이 불법적이건 합법적이건 간에) 인터넷을 먼저 검색하곤 한다. YouTube와 같은 동영상 사이트의 방문이 늘어나고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영상물 시청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TV를 시청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기존의 TV 네트워크 사업자들도 시청자들의 새로운 패턴에 걸맞게 주문자 비디오 서비스(VOD)라든지 디지털 레코딩 서비스(PVR) 등을 제공하며 고객을 다시 TV 앞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결국, 근 미래의 영상산업의 화두는 ‘화질 차이’ 못지않게 ‘소비 패턴’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Blu-ray 진영과 HD DVD 진영의 도토리 키재기 식의 포맷전쟁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리다 지친 소비자들은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애플의 행보는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가지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경쟁자들보다 훨씬 많은 컨텐츠와 뛰어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가진 애플의 iTunes Store는 그만큼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더군다나, iPod의 성공을 바탕으로 탄생한 Apple TV라는 훌륭한 동영상 재생 장치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용자들은 굳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TV 앞에 앉아야 할 필요가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할 수도 있고,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 iPod/iPhone과 같은 휴대용 장비를 이용할 수도 있다. 영화를 빌리고자 차를 몰고 비디오 대여점에 갈 필요도 없이 간단한 클릭으로 원하는 영화를 합법적으로 내려받을 수 있다. 애플은 사용자의 다양한 영상물 소비패턴에 들어맞는 완벽한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애플과
Apple TV는 그다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애플이 제공하는 동영상의 품질이 경쟁하는 다른 매체가 제공하는 HD 품질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높아진 소비자의 기준에 한참 떨어지는 영상물을 사고자 지갑을 열 사용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애플은 이미 동영상을 소비하는 방법에 대한 충분히 훌륭한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현재 처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은 고품질의 HD급 영상물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얼마 전 NBC가 iTunes Store와 계약을 종료하면서 자사의 컨텐츠를 모두 거두어 버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애플이 컨텐츠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컨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들로부터의 견제도 그만큼 심해질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애플은 HD급 동영상의 제공을 위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컨텐츠를 제공하는 업체들과의 계약문제 때문에 서비스를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의 반증으로, Apple TV에서 이미 HD 동영상의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들도 들려온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되든지 간에 결국에는 애플이 iTunes Store를 통해 HD급의 영상을 선보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지루한 포맷전쟁에서 승리의 깃발에 먼저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은 애플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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